기독교의 구원은 싸구려?
"이 글은 당당뉴스(DangDang News)에 공식 기고된 목사님의 소중한 기록입니다."
- 매체사: 당당뉴스 (The DangDang News)
- 발행일: 2012-05-05
- 필자: 김기천 목사 (Rev. Kee Cheon Kim)
📜 목사님 원고 전문 (Manuscript)
기독교의 구원은 싸구려?
업데이트 2012.05.05 01:50
익투스트래블190423
"믿음은 구원의 조건이고 행함은 구원의 결과입니다."
일전에 아침먹자고 해서 따라갔다가 남편되시는 분에게 예정론과 자유의지론에 관련된 질문을 받은 일이 있었지요. 그 후 새벽예배 마치고 또 아침 먹으러 가자고 해서 따라갔습니다. 이번에는 부인되시는 분께서 기독교의 구원론에 관한 질문을 던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질문을 하게 된 배경은 이렇습니다. 어떤 분을 전도하면서, 우리가 늘상 하는 식이긴 하지만, "예수님을 영접하세요. 그러면 구원을 받습니다."라고 말했더니 그분이 그렇게 쉽게 받는 것이 구원이냐고 반문하더라는 것입니다. 다른 종교들은 구원(도의 경지)에 이르려면 온갖 고행이나 수행을 거쳐야 되는데 기독교는 그저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니 그런 싸구려 구원을 제시하는 것이 참 종교이겠느냐라는 식의 반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부인께서 이런 식의 반문을 듣고 몹시 속상했다고 털어놓았습니다.
그래서 비유로 다음과 같이 말씀을 드렸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돈하면 이해가 빠르기 때문에 돈으로 설명을 드렸지요. 한 달 동안 일을 하면 100만 불(약 10억원)을 주는 두 명의 다른 주인이 있었습니다. 첫째 주인은 보통 그러는 것처럼 한 달 일을 하면 마지막 날에 일한 대가로 100만 불을 주는 주인입니다. 그런데 둘째 주인은 달랐지요. 아직 일을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100만 불을 척 내어주는 그런 주인인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일군들의 태도입니다. 첫째 주인에게 연결된 일군들은 한 달 후에 받을 월급을 위해 열심히 일을 해야겠지요. 혹시 중간에 잘못하면 그 월급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안달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매일 매일 긴장하며 더욱 정진에 힘써야 합니다. 매일 생활이 고행이며 수행이겠지요. 그런데 둘째 주인과 함께 하는 일군들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생활합니다. 아직 일을 시작도 안했는데, 혹시 중간에 실수도 할 수 있을지 모르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은 일군을 믿어주고 그 월급을 미리 준 것입니다. 그러니 일군은 주인을 볼 때마다 감사할 뿐이지요. 한 달 동안 일을 한다는 것도 무엇을 받으려고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벌써 받았으니까요. 일을 한다는 것은 그저 받은 은혜에 감사해서 보답으로 하는 것이지요.
위에 비유에서 주인은 세상에 있는 종교들의 신이라고 할 수 있고, 100만 불은 각 종교들이 제시하는 구원을 가리키며, 일군들은 그 종교를 믿는 신도들을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모든 종교들은 첫째 주인과 같이 나중에 얻는 구원을 제시합니다. 그런데 유독 기독교만은 둘째 주인처럼 먼저 받는 구원을 말합니다. 물론 기독교가 유대교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유태인들은 "구원"이라는 말을 쓰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이라는 선민사상(選民思想)이 있습니다. 유태인들이 그들의 하나님에게 인정받는 행동을 해서 그 결과로 선택받은 것이 아니라 그냥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받은 것이지요.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여러 민족들 가운데 유태인들을 미리 선택하신 것이지요. 유태인들에게는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런 토양에서 나온 기독교 역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구원을 말합니다. 기독교의 구원은 수행의 대가로 얻는 구원이 아닙니다.
구원을 미리 받는다고 싸구려 구원인가요? 아니지요. 사실 구원을 "먼저 받느냐" 아니면 "나중에 받느냐"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앞에 비유에서 월급으로 100만 불을 먼저 받은 일군과 나중에 받을 일군들의 모습과 같이 구원을 먼저 받느냐 나중에 받느냐에 따라 아주 다른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구원을 나중에 받아야 하는 사람의 신앙생활은 매일매일 고행과 수행의 생활이라고 할 수 있지요. 반면에 먼저 구원을 먼저 받은 사람의 신앙생활은 매일매일 감격, 감사, 기쁨의 삶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구원을 언제 받느냐에 따라 삶의 질이 전혀 다른 것입니다.
구원을 미리 받고 신앙생활하는 사람에게는 하루하루가 천국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 말하는 천국은 현재의 천국과 미래의 천국 두 가지를 모두 말합니다. 미래에 죽어서 가는 나라도 천국이지만 지금 여기서부터 누리는 천국도 있는 것이지요. 이런 천국 개념을 신학교에서 "천국은 이미(already) 시작되었지만 그러나(but)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not yet)"라고 가르치지요. 그래서 천국에 관한 논의에서 "already but not yet"이란 표현을 가끔 듣곤 합니다.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곧 천국의 삶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기독교인의 삶에서 특히 강조되는 것이 천국과 같은 삶 곧 "사랑, 소망, 평화, 은혜, 감사, 감격, 기쁨의 생활"이지요. 그래서 바울은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고 가르쳤지요. 바울은 말로만 가르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것들을 생활 속에서 경험하며 살았지요. 감옥에 갇혔을 때에도 감사와 찬양을 쉬지 않았지요. 그랬더니 옥문까지 열리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감옥과 같은 장소도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바울에게는 천국이 된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 안에 있다면 천국을 누리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구원을 먼저 받느냐 아니면 나중에 받느냐?"란 질문은 "믿음으로 구원받느냐 아니면 행함으로 구원받느냐?"란 질문이 될 수도 있습니다. 행함으로 구원받는 경우는 열심히 수행이나 고행과 같은 종교생활을 통해 덕을 쌓으면 나중에 그 대가로 구원을 받는 것이지요. 일반 종교들이 강조하는 구원의 길입니다. 그러면 기독교는 어떤가요?
기독교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앞에 비유에서 보면 월급을 나중에 받게 되는 일군에게는 "믿음"이란 단어가 그다지 중요치 않습니다. 주어진 대로 열심히 일만 하면 그 대가로 나중에 월급을 받게 되니까 말입니다. 이런 일군들에게는 "행함"이 중요하지요. 행함의 결과에 따라 월급이 주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월급을 먼저 받는 일군에게는 "믿음"이란 말이 상당히 중요합니다. 이 믿음이란 쌍방이 갖는 믿음입니다. 주인은 일군을 믿어주고 일군은 주인을 믿어주는 그런 믿음을 말합니다. 이 믿음이 있기 때문에 주인은 일군에게 미리 월급을 준 것이고 일군은 주인에게 그 믿음(신용)을 보여줌으로 월급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은 우리의 "행함"의 대가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신실한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믿음"의 대가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나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그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는 그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구원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열심히 노력하고 일해서 구원을 받은 것이라면 그런 구원을 은혜(grace), 은사(gift)라고 할 수 없지요. 성경은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라고 밝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기독교에서는 "행함"이 중요하지 않는가요? 아주 중요합니다. 성경을 보면 바울서신 특히 로마서에서 보면 행함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야고보서를 읽어보면 믿음보다는 행함을 강조합니다. 기독교에서 믿음과 행함의 상관관계를 이해하지 못하면 오해를 일으키게 됩니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바울서신에 근거한 "믿음에 의한 칭의(稱義, Justification)"를 강조하던 나머지 "행함"을 말하는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epistle of straw)라고 비하시키기도 했습니다. "믿음"을 강조하다보면 "행함"을 도외시 할 수 있는 한 예이지요.
감리교 창시자 요한 웨슬리(John Wesley)가 살던 당시 18세기 영국에서는 믿음의 구원만을 강조했지요. 당시 영국 교회는 사람들에게 일단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게 되며 그 구원은 소멸되지 않는다고 가르쳤다고 합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구원을 받은 이후에 죄가 되는 행동이나 타락한 생활을 하더라도 천국에 가는 데는 문제가 없다는 식으로 가르쳤다고 하네요. 신학교에서 들은 기억에 의하면 영국 역사상 가장 타락하고, 술이 가장 많이 팔렸던 시기가 18세기였다고 합니다. 같은 기독교인이라도 어떻게 배웠느냐에 따라 사는 모습이 달라질 수 있다는 하나의 역사적인 교훈이기도 합니다. 요한 웨슬리는 믿음에 의한 구원을 가르쳤지만 동시에 행함을 통한 성화(聖化, Sanctification)를 가르침으로 당시 교회에 잘못된 교리를 바로잡았던 것이지요. 같은 18세기에 프랑스 역사에는 피를 흘리는 혁명이 있었지만 영국 역사에는 피 대신 요한웨슬리의 바른 가르침이 있었던 것입니다.
기독교의 구원론을 보면 믿음은 구원을 받는 조건입니다. 그러나 행함은 구원을 완성하는 조건입니다. 쉽게 말하면 믿음으로 시작하고 행함으로 완성한다는 것입니다. 앞에 제시한 비유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월급 100만 불을 먼저 준 주인은 일군을 믿고 그 돈을 건네준 것이지요. 물론 그 일군은 주인의 뜻에 따르겠다는 믿음을 보여준 것이고요. 그 일군의 믿음은 곧 신용이지요. 신용(믿음) 때문에 미리 월급(구원)을 선불(은혜)로 받고 그 신용(믿음)의 증거로 열심히 일하는 것(행함)과 같은 이치입니다. 만일 월급은 받아 챙기고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은 곧 "신용불량자"가 되는 것이지요. 기독교인들 가운데 이런 사람, 영적인 신용불량자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을 위해서 구원받은 후의 행함, 생활을 결산하는 시간 즉 심판의 때가 임할 것이라고 성경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에서 구원받는 것은 단순합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면 구원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쉬운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것은 예수님과 닮은 거룩한 삶(聖化, Sanctification)을 살겠다는 결심이지요. 하나님은 우리의 그러한 결심, 믿음을 보시고 우리를 믿어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을 선물로 미리 주신 것이지요. 결국 구원을 받은 그 순간은 새로운 거룩한 생활을 시작하는 출발점인 것입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면 그런 구원을 허락하신 하나님에게 "믿음의 열매"를 보여드려야 합니다. 믿음의 열매란 하나님을 닮아가는 생활 즉 거룩하게 변화되는 행동입니다. 이런 행함의 열매가 나타나지 않는 믿음에 대해서 야고보서에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약 2:17),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 것이다(약 2:20),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된다(행 2:22)"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마는 "믿음은 구원의 조건이고 행함은 구원의 결과입니다." "믿음"과 "행함"은 동전의 양면과 같이 떼어낼래야 떼어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의 순서로 따진다면 먼저 믿음이 있고 다음으로 행함이 뒤따르는 것입니다. 선불로 월급을 받고 일하는 것과 같이 이치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먼저 구원을 받았으면 이후로는 하나님을 닮아가는 성화(聖化, sanctification)의 생활이 행동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선행은총(先行恩寵, prevenient grace)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알기도 전에 그분은 나를 위한 구원을 미리 완성시켜 놓았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처음으로 깨닫고 받아들일 때에는 우리에게 여전히 죄인된 모습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지나간 죄와 허물을 용서해주시고 구원의 은총을 내려주십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구원을 말할 때는 하나님의 용서, 사랑, 은사, 은혜, 은총 등을 말하지요. 그러한 하나님의 놀라운 용서, 사랑, 은사, 등을 깨닫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찬양으로 어우러진 기쁨의 생활 즉 천국 생활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를 드리는 이유나 목적 또한 구원을 얻으려고 드리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구원을 베푸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과 경배를 하기 위해 드리는 것이지요. 구원받은 사람들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을 닮아가는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고행이나 수행을 통한 변화라기보다는 감사와 기쁨을 통한 변화입니다. 이와같은 구원에 가르침을 아는 기독교인은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합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로마서 8장 35-39절)
기독교인은 구원을 얻기 위해서 신앙생활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먼저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감사와 기쁨으로 신앙생활하는 것입니다.
🏛️ 최고 신학자의 심층 분석 및 현대적 해석
김기천 목사 "기독교의 구원은 싸구려?" 심층 해설 및 분석
1. 핵심 요약
김기천 목사는 기독교 구원에 대한 흔한 오해, 즉 '너무 쉽게 얻는 싸구려 구원'이라는 비판에 대해 명쾌하게 답한다. 그는 비유를 통해 기독교 구원은 행위의 대가가 아닌 믿음에 근거한 하나님의 선물임을 강조하며, 이는 유대교의 선민사상에서 비롯된 은혜의 개념과 연결된다고 설명한다. 구원을 '미리 받는' 기독교인은 감격과 감사로 가득한 천국 생활을 누리며, 믿음은 구원의 조건이자 행함은 구원의 결과라는 균형 잡힌 시각을 제시한다.
2. 신학적 인사이트
김기천 목사의 글은 기독교 구원론의 핵심 쟁점을 명료하게 드러내면서도, 역사적·철학적 맥락을 아우르는 깊이 있는 통찰력을 제공한다. 그의 논지를 더욱 풍성하게 이해하기 위해 다음 사항들을 고려해 볼 수 있다.
2.1. 값싼 은혜 (Cheap Grace) 논쟁:
김 목사가 언급한 '싸구려 구원' 논쟁은 20세기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의 '값싼 은혜(cheap grace)' 개념과 맞닿아 있다. 본회퍼는 값싼 은혜를 "회개 없는 죄 사함, 자기 부인 없는 세례, 십자가 없는 기독교"라고 비판하며, 이는 진정한 제자도를 저버리는 행위라고 경고했다. 김 목사의 글은 이러한 맥락에서, 믿음으로 받는 구원이 행함의 중요성을 간과하는 '값싼 은혜'로 변질될 위험성을 경계하고, 믿음과 행함의 균형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2.2. 예정론 (Predestination) vs. 자유의지 (Free Will):
글 서두에 언급된 예정론과 자유의지 논쟁은 기독교 신학의 오랜 난제 중 하나이다. 예정론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에 의해 구원이 결정된다는 입장이고, 자유의지론은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이 구원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입장이다. 김 목사는 이 논쟁에 직접적으로 뛰어들기보다는, 유대교의 선민사상을 통해 하나님의 '선택'이라는 개념이 인간의 '행위'에 선행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는 예정론적 관점에 더 가까워 보이지만, 동시에 '믿음'이라는 인간의 응답을 구원의 조건으로 제시함으로써 자유의지의 여지를 남겨두는 균형 잡힌 접근법을 취하고 있다.
2.3. 칭의 (Justification) 와 성화 (Sanctification):
김 목사는 루터의 '칭의' 개념과 웨슬리의 '성화' 개념을 언급하며, 믿음과 행함의 관계를 설명한다. 칭의는 믿음을 통해 의롭게 여겨짐을 받는 것을 의미하며, 성화는 성령의 역사로 점차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변화를 의미한다. 김 목사는 믿음으로 칭의를 얻는 것이 구원의 시작이며, 성화는 구원받은 자의 필연적인 결과임을 강조한다. 이는 칭의와 성화를 분리하거나 대립시키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여정 속에서 서로 긴밀하게 연결된 과정으로 이해하는 관점이다.
2.4. 천국 (Kingdom of God) 의 현재성과 미래성:
김 목사는 천국이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already but not yet)'는 신학적 통찰을 제시한다. 이는 천국이 단순히 미래에 도래할 이상향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미 현재 속에서 경험할 수 있는 현실임을 의미한다. 구원받은 자는 성령의 능력으로 사랑, 소망, 평화, 은혜, 감사, 감격, 기쁨을 누리며 천국을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죄와 고통이 여전히 존재하는 세상에서 천국은 완전히 실현되지 않았으며, 미래에 완성될 것을 소망하며 살아가는 것이 기독교인의 삶이다.
2.5. 은혜 (Grace) 와 선물 (Gift)로서의 구원:
김 목사는 구원이 인간의 노력이나 공로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와 '선물'임을 거듭 강조한다. 이는 기독교 구원론의 핵심적인 특징이다. 은혜는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베푸는 호의를 의미하며, 선물은 대가 없이 주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은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고 스스로 구원할 능력이 없지만,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먼저 다가오셔서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다. 이러한 은혜에 대한 응답이 믿음이며, 믿음은 구원의 선물을 받는 통로가 된다.
2.6. 종교 다원주의 (Religious Pluralism) 에 대한 간접적 비판:
김 목사는 다른 종교들이 '나중에 얻는 구원'을 제시하는 반면, 기독교는 '먼저 받는 구원'을 제시한다고 대비시킨다. 이는 종교 다원주의에 대한 간접적인 비판으로 해석될 수 있다. 종교 다원주의는 모든 종교가 궁극적으로 동일한 진리를 추구하며, 각자의 길을 통해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김 목사는 기독교 구원의 독특성을 강조함으로써, 다른 종교와는 구별되는 기독교만의 유일성을 변호한다.
2.7. 성경 (Bible) 해석의 중요성:
김 목사는 바울서신과 야고보서의 상반된 가르침, 그리고 요한 웨슬리의 역사적 사례를 통해 성경 해석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성경은 다양한 문학 장르와 역사적 배경을 가진 텍스트들의 모음집이므로, 전체적인 맥락과 조화를 고려하여 해석해야 한다. 특정 구절이나 교리에만 치우치지 않고, 성경 전체가 증거하는 진리를 균형 있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2.8. 삶의 변화 (Transformation) 와 열매 (Fruit):
김 목사는 구원이 단순히 죄 사함이나 천국행 티켓을 얻는 것이 아니라, 삶의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것임을 강조한다. 구원받은 자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하나님을 닮아가는 성화의 과정을 거치며, 그 삶 속에서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라는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된다(갈 5:22-23). 이러한 삶의 변화와 열매는 구원의 진정성을 입증하는 증거가 된다.
3. 결론
김기천 목사의 "기독교의 구원은 싸구려?"는 단순한 변증을 넘어, 구원론의 핵심 쟁점을 깊이 있게 다루는 훌륭한 신학적 성찰이다. 그는 비유와 역사적 사례, 그리고 성경적 근거를 통해 기독교 구원의 독특성과 풍성함을 드러내며, 독자들에게 믿음과 행함의 균형 잡힌 신앙생활을 촉구한다.
기독교인은 구원을 얻기 위해 신앙생활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받은 구원에 감사하며 기쁨으로 신앙생활하는 존재이다. 이 글을 통해 독자들은 값싼 은혜에 빠지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진 구원의 참된 의미를 깨닫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섬기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